킬 빌, 대체 어떤 사진으로 이 리뷰를 시작해야 가장 좋을까를 한참 고민해도, 워낙 담긴 이야기가 많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기에 망설이다, 결국 킬 빌에서 가장 유명한 경구로 포스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Revenge is a dish best served cold."
복수는 식혀 먹어야 더 맛있는 음식과 같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문구.
깜깜한 화면에, 장식 따위 되지 않은 심플한 클린건 속담1이 나오고, 신부(The Bride)의 다급한 숨소리가 들리며 영화는 시작된다. 흑백 처리가 되어있음에도, 보는 사람이 절로 혀를 차게 만드는, 혹은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충격적인 시작 장면을 지닌 영화, 킬 빌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다.
1. 개요; 감독/ 출연 등.
총 111분의 러닝 타임을 가진 영화, 킬 빌 vol.1 은 B급 영화와 일본 애니메이션, 중국의 무협 영화가 떠오르게 만드는 센스로 유명한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가 감독했고, The Bride의 캐릭터는 우마 서먼과 쿠엔틴 타란티노(U와 Q로 표현됨)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동일 감독의 작품인 펄프 픽션(Pulp fiction, 1994)에도 출연했고, 스릴러로 유명한 조엘 슈마허 감독의 배트맨 앤드 로빈(Batman & Robin, 1997; 왠만하면 보지 않는 것을 추천)에서 Poison Ivy로 출연하기도 했던 섹시 스타, 우마 서먼(Uma Thurman)이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
(사실 '캐스팅되었다'라는 표현보다는, 이 영화 자체가 우마 서먼을 위한, 우마 서먼에 의한, 우만 서먼의 영화라고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애초에 영화 제작 시기도 우마 서먼의 결혼과 임신으로 인해 미루어졌고, 쿠엔틴 타란티노가 애초에 '우마 서먼'을 주인공으로 잡아서 영화를 구상했다고 하니, 이 영화는 그야말로 "오직 우마서먼"인 영화인 것이다. 비슷한 느낌으로 배우 하나나만을 위한 한국 영화로는 칠광구가 있으나, 칠광구가 그야말로 성냥팔이소녀의 재림 급의 재난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쿠엔틴 타란티노의 우마서먼에 대한 빠심은 보통이 아닌 것이다.)
다음으로, 미녀 삼총사(Charlie's angels, 2000)에서 섹시 다이나마이트한 동양계 요원으로 등장했던, 그리고 아셨는지 모르겠지만 쿵푸 팬더(Kun fu panda, 2008)에서 Viper의 성우를 담당했던 루시 루(Lucy Liu)도 엄청난 존재감을 자랑하며 등장한다.
이외에도 데이빗 카라딘, 비비카 에이 폭스 등등 여러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사실 킬 빌 1편에서의 가장 중요한 배우는 우마 서먼과 루시 루 뿐이므로, 다른 배우들은 그 이름 철자로 쓰지 않을 생각이다. (그렇지만, 킬 빌 2편에 대해 리뷰를 쓰게 된다면, 그 때는 데이빗 카라딘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다. 이 아저씨는 진짜 간지 폭풍인데다가, 죽는 것도 진짜 굉장하게 죽어서 꼭 이야기를 하고 싶은 아저씨다.)
2. 줄거리 및 등장인물
킬 빌 1의 줄거리를 짧게 요약해서 말하자면?
"불청객에 의해 행복한 결혼식날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 신부, 4년 간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펼치는 피의 복수극"
조금 더 드라마틱한 느낌을 살려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4년의 혼수 상태에서 깨어난 신부. 그러나 그녀의 배에서 숨쉬던 아이는, 태어나지도 못한 채 사라져버리고, 그녀를 축하해주려고 모였던 이들도 모두 죽어버렸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을 습격했던 암살단에 대한 복수 뿐. 한 때 자신이 속해있었던 조직, 그 조직에서 배운 기술들을, 그 조직에게 다시 돌려주는 것이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킬 빌은 복수 영화가 아니다."라고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지만, 어쨌든 영화를 딱 보고 기억에 남는 것, 그리고 영화에 대한 한마디 표현은 누가뭐래도 "복수극"이다. 감독의 의도와 내 느끼는 바가 다른 점은 좀 슬프게 생각하지만, 사실 킬 빌을 복수극이 아니면 어떻게 봐야할지 잘 감이 오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된 로맨스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뭐, 역시 킬 빌은 대표적인 복수극이다.
복수극의 주인공, 처절한 복수의 주인공이자 광기와 분노에 빠져있음에도, 이성적인, 극중의 말을 빌리자면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자비와 동정심, 용서일 뿐인 ("It's mercy, compassion and forgiveness I lack, not rationality") 여전사는 우마 서먼이 연기한 "The bride"이다.
The Bride, 코드명은 Black Mamba.
1편에서는 그 본명이 아주 비밀스럽게 감춰지는 여인이다. 이름이 나올 때면 삐-하는 소리로 처리되어서, 도저히 알 길이 없는데, 킬 빌 2편에서는 너무 손쉽게 그 이름을 밝혀서 맥이 빠져버린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4년의 혼수 상태에서 빠져나오자마자 한 일이 자신을 강간하려는, 그리고 강간했던 남자들을 죽인 것인, 그리고 4년 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다리를 "Wiggle your big toe"라는 명령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강철 같은 의지의 여인. 무참히 사람들을 베어넘기는 인간 도살자라고 불러도 좋을만한 학살극을 벌이는 이 여인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우마 서먼의 그 아름다운 외모가 드러나기 힘든, 메이크업 따위는 없이 계속해서 바닥을 굴러다닌 것 같은 연출을 해야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아름다운, 그리고 치명적인 여인인데, 비슷한 헐리웃의 여인천하활극이라고 할 수 있는 미녀 삼총사와 비교했을 때, 훨씬 더 거칠고 수수한 느낌이다.
The Bride의 적수이자, 1편의 주요 대적자로 등장하는 인물은 오렌 이시. 루시 루가 연기했다.
서양의 동양, 특히 일본에 대한 환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의 여인.
그녀의 과거사를 보고 있노라면, 옛날 일본에서 만들어진, 스즈키 노리부미 감독의 불량 여두목(Sex and fury, 1973)이 떠오른다. (물론 그것에 비해서는 노출이 훨씬 적다.)
오렌 이시는 "Deadly Viper Assassination Squad"의 전 멤버로, 당시의 코드 네임은 "Cottonmouth."
반은 일본인, 반은 중국계 미국인인 이 여인은 The Bride의 살인 명단에 첫번째 이름으로 오르는 영광을 얻는다. 특이하게도, 주인공의 과거사도 제대로 밝히지 않는 영화에서 그 출생 및 성장 배경이 매우 세세하게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설명되는 캐릭터로, 이렇게 과거사가 확실하게 밝혀진, 그리고 중요하게 다루어진 캐릭터는 오렌 이시가 유일하다.
9살에 부모를 잃고, 11살에 그 복수를 하고, 20살이 되었을 때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암살자 중 하나가 되었으며, 그 이후에는 "The Crazy 88"의 보스가 되어 도쿄의 암흑가를 일통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주인공이 너무 짱 센 덕분에, 조직원은 물론이고 자기 목숨까지 잃어버린다.2
이 외에도
1편에서는 손과 목소리만 등장하는 미지의 인물, Bill.
초반에 주인공을 죽이려하지만, Bill에 의해 제지되어 빡친 채로 돌아가는 Elle Driver,
예쁜 딸내미와 함께 과거를 잊고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다가 갑자기 등장한 주인공에게 순식간에 살해 당해버린, Vernita Green,
그야말로 오마쥬의 결정판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는, 일본 여고생이자 철퇴를 무기로 쓰는 미친 존재감의 고고
등이 있지만, 이번 포스트에서는 영화를 전체적으로 리뷰하고 싶은 것이지 등장 인물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고 싶은 것은 아니므로, 과감히 생략한다.
(귀찮은 거 아님 x)
3. 영화의 특징 및 감상 포인트
영화는 자기 보고 싶은대로 보면 되는 것이지, 무슨 특징을 따로 설명하고, 감상 포인트를 설명하는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결국 이런 포인트를 잡는 건, 내가 그 지점에서 꽤나 감명이 깊었다는 의미일 것이므로, 포인트를 잡아보도록 하겠다.
1) 과장 (hyperbole)
킬 빌은, 1편과 2편을 통틀어서, 계속해서 (사실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굉장히 과장된 묘사를 보여준다. 화려하고 치명적이면서도, 절제된 느낌을 주는 액션신(본 시리즈에서 나오는 그런 액션신)에 익숙한 사람이 처음 킬 빌을 보았다면,
'뭐야, 왜 안죽어?'
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또는
'뭐야, 이 만화 같은 건?'
'무협 영화야?'
라는 생각을 하거나.
필자는 이 부분이, 영화를 굉장히 매력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킬 빌의 액션은 그야말로 '만화' 같다. 그러니까, 만화책보다는 애니메이션에 가까운 액션신을 보여준다. 주먹질 한 번에 사람이 부웅 하늘을 날고, 칼을 한 번 휘두르면 상대의 칼은 물론이고 팔도 잘려버린다. 그렇게 두들겨 맞았는데도 좀비처럼 일어나고, 칼날이 챙챙 번쩍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상대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죽는다.
이러한 과장된 액션신의 연출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취향을 보여주기도 하고, 그가 추구하는 액션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쩌면 물리적인 제약에서 벗어났기에, 그야말로 감독의 적나라한 취향을 보여줄 수 있는 애니메이션 씬, 즉 오렌 이시의 과거사 씬에서 보이는 액션씬은, 무척이나 역동적이고 과장되어 관객에게 무척이나 인상 깊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러한 과장법으로 영화의 액션신을 처리한 덕분에, 액션신의 진지함은 조금 떨어질 수 있지만, 그 역동성과 과감성, 그리고 화려함은 굉장해진다.
이런 만화 같은 액션신은 자연스럽게 홍콩 영화, 일본 영화를 떠오르게 만든다.
그리고 특히 그런 동양 영화 중에서도, 킬빌 vol.1 은 일본의 사무라이 활극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이에 반대되게, 킬빌 vol.2는 중국식 무협영화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주인공이 사용하는 칼이 일본도라는 점, 나레이터 겸 복수의 조언자가 하토리 한조라는 일본인이라는 면, 그리고 마지막 대결이 일본 야쿠자들과의 대결이라는 점 등을 고려했을 때, 중국식 무협 영화보다는 일본식 검객의 활극에 가까운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세련된 느낌을 주면서도, 과거의 향수를 살려내서, 굉장히 오래된 영화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무척 최근의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게 만드는 과장된 액션신을 위해서, 배우들의 동작은 크고, 카메라의 움직임은 어지러우며, 팔, 다리가 날아가고 피가 비산하는 장면들이 과감하게 등장한다.
이런 과장된 측면을 하나의 매력으로 받아들이고, 그 지점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면... 뭐랄까, 킬 빌은 썩 재미있는 영화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2) 명예 또는 고귀함
킬 빌을 그저 '복수극'이 아니게 만드는 것은, 혹은 킬 빌을 여타의 복수극과 다르게 만드는 것은 복수의 방침에 있다. 주인공은, 단순히 상대를 죽이지 않는다. 아니, 이 표현보다는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낫겠다.
주인공인 신부는 복수를 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상대를 죽이지는 않는다.
그녀는 복수를 하지만, 그 복수는 정정당당하게 이루어지며, 그녀는 무방비의 상대를 공격하기보다는, 상대 또한 준비된 상태에서 승부를 결한다. 그렇다. 복수라기보다는, 승부를 결한다는 느낌이 더 옳게 느껴진다.
The Bride는 잠자는 상대를 습격하거나, 이동 중인 상대의 차를 폭발시키거나, 딸을 인질로 삼아 상대의 목숨을 노리지 않는다. 그녀는 상대의 아지트로 숨어들어가, 상대를 조심스럽게 죽이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의 아지트에서 당당하게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외친다.
헐리웃에서 만들어진, 여인 주인공을 주제로 한 액션극인 "미녀 삼총사"와 다른 지점도 그 지점이다. 미녀 삼총사는 요원으로, 암습도 가리지 않고, 비겁함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The Bride는 복수를 원하면서도, 명예를 추구한다. 어찌보면 무사도,기사도의 표본처럼 행동하며 복수를 실행한다.
그러한 고귀함 (혹은 무사도라고 표현해야 할까?) 은 다음의 두 장면에서 잘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첫 장면은 신부가 바니타 그린의 딸 앞에서 그녀를 죽였을 때다. 문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며,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It was not my intention to do this in front of you. For that I'm sorry. But you can take my word for it, your mother had it comin'. When you grow up, if you still feel raw about it, I'll be waiting."
네 눈앞에서 이러고 싶지는 않았어. 미안하구나. 내 말은 진심이야. 이건 네 엄마가 자초한 일이란다. 만약, 나중에 네가 더 큰 후에도, 나에 대해 증오를 느낀다면... 나는 네 복수를 기다리마.
복수를 하는 사람치고는, 꽤나 감상적이다. 복수 대상의 딸인데도 불구하고, 그 딸이 보는 앞에서 결투를 피하기 위해 "장소를 정하자"고 말하는 모습도, 그리고 복수를 한 후에 그 딸에게 복수의 기회를 주는 모습도, 옛날에 보았던 무협지에 나오는 정정당당한 정파의 무사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다음으로, 마지막 오렌 이시와의 결투 장면에서도, 단순히 '죽고 죽이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오렌 이시에게 신부가 한 칼을 먹이고, 오렌 이시는 붉은 피를 흘린다. 그리고 조용히 말하기를,
"For ridiculing you earlier, I apologize.(일전에 너를 비웃었던 것, 사과한다.)"
하고 사과한다. 그리고 신부는 눈물을 참으며, "Accepted.(사과를 받아주마.)" 하고 사과를 받아들인다.
이는 신부의 목적이 단순히 '복수'에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녀의 복수는 그저 '나에게 이런 짓을 한 작자들이 대가를 치루게 해주겠어'라는 의미를 넘어서, 그간 쌓아오고 엮어둔 인연의 고리를 자르는 것이고, 둘 사이의 관계를, 그리고 둘 사이에 더 있을 수 있는, 더 생길 수 있는 미래의 관계마저도 정리하는 종결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부는 단순히 상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전력을 다해서 상대와의 'unfinished business"를 해결하려 드는 것이고, 그러한 이유로 인해서, 그녀는 어쩌면 멍청해 보이는 방식으로 복수를 행하는 것이다.
하토리 한조는 신부에게 복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Revenge is never a straight line. It's a forest, And like a forest it's easy to lose your way... To get lost... To forget where you came in." (복수는 쭉 뻗은 길이 아니라, 숲에 가깝다. 그리고 숲처럼, 길을 잃기도 쉽고, 어디서 왔는지를 잊기도 쉽지.)
이런 난해한 복수의 길에서, 신부가 길을 잃지 않고 자신의 복수에 전념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그 복수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녀의 이러한 고귀한 정신, 무사도를 지키는 정신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3) 침묵
킬 빌이 그저 눈이 번쩍거리는 액션신으로 이루어진 복수극이었다면, 영화를 보고나서 이렇게 큰 찝찝함(이랄까. 이 표현이 싫으면 감정의 앙금이라고 해도 좋겠다.)을 남기는 이유는, 영화가 그대에게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킬 빌은 굉장히 많은 측면에서 침묵한다.
킬 빌은 대사가 굉장히 적고, 그 속에서도 주인공의 심리를 드러내는 대사는 정말 손에 꼽을만하다. 대부분의 경우, 행동으로 또는 침묵으로 캐릭터를 묘사하고, 그 묘사마저도 상상의 여지를 두고 펼쳐진다.
'아, 이 때 주인공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
'어? 둘이 무슨 관계지? 뭔가 깊은 관계는 관계였나본데!'
상황 설명을 과감하게 잘라버린 덕분에, 영화는 관객에게 상상의 여지를 풍부하게 남겨두었고, 그 덕분에 영화는 관객의 뇌리에 더 오래 남을 수 있게된 것 같다. 뭐랄까, 그야말로 보이는 부분만을 보여주었달까?
피투성이의 신부가 등장하는 충격적인 오프닝으로 시작해서, 바니타 그린에 대한 복수를 보여주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 식물인간에서 깨어나 복수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비비꼬인 시간줄 속에서, 주인공은 과묵하고 터프한 침묵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신부의 여정은, 그녀가 복수를 위해 칼을 뽑아 들고, 자신을 배반한 조직- 어쩌면 그녀의 세상을 구성하던 모든 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그고통의 행로는 침묵에 가까우며, 그 캐릭터는 철저히 내면적이다. 손쉽게 대사를 통해 캐릭터를 보여주지 않고, 고지식하게 느껴질 정도로 장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 속에서 상상의 나래는 커지고, 영화에 더 몰두할 수 밖에 없다.
특히 마지막 청엽정에서의 전투는, 그야말로 무성 영화에 가까울 정도여서, 몇 마디 짤막한 대사를 빼고는 대사가 등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대사 없음으로 인하여 더욱 호소력 짙게 우리에게 그 장면이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전투 도중 오렌 이시가 뒤쪽으로 사라지는 모습에 신부가 "앗, 어딜 가는거야! 멈춰!" 따위로 소리를 질렀다면, 오히려 그녀의 다급한 심정이 희화되지 않았을까?
4) 음악
킬 빌의 특징을 꼽으면서, 매력적인 음악들을 소개하지 않을 수는 없다.
아주 세련된 느낌이 들거나, 아주 상황에 잘 어울린다기 보다는, 어딘가 묘한 B급 영화의 센스가 느껴지는 음악들이 킬빌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묘한 것은, 이 적당한 B급 센스의 오래되고 조금 촌스러워보이는 느낌이, 오히려 영화의 느낌을 잘 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애초에 고전 일본 사무라이 활극에 대한 오마쥬이니, 이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킬 빌에서 사용된 음악들은 각종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활용되기도 하고, 인터넷 동영상 등에서도 꽤나 활용되었다. 유명한 것들을 이야기하자면, Tomoyasu Hotei의 "Battle Without Honor or Humanity"(2:28)
그리고 놈놈놈, 빠삐놈 따위로 유명했던 노래인 "Don't Let Me Be Misunderstood"(Santa Esmeralda – 10:29). 이 노래의 경우에 영화에서는 초반의 박수치는 부분만이 거의 무한 반복으로 나오게 편집되어 있다.
이외에도 마지막 결투 장면을 장식하는 노래, 그야말로 추억이 물씬 물씬 풍겨나오는
Meiko Kaji의 The Flower of Carnage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여러 음악 중에서도, 킬 빌의 분위기를 가장 잘 묘사하는, 그리고 주인공인 신부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노래는, 왠지 영화의 오프닝을 담당한 노래인 "Bang Bang (My Baby Shot Me Down)" 이라는 생각이 든다.
Nancy Sinatra 에 의해 불려진 이 곡은, 그야말로 킬 빌의 주제곡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가사도 그렇고, 그 내용도 그렇고, 말 그대로 킬 빌을 위한 노래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 순으로 생각하자면, 이 노래를 위해 킬 빌이 만들어졌다고 해야할까?)
전체적으로 고전적인, 그리고 약간은 촌스러운 듯한 느낌이 드는 듯한 음악들은, 홍콩 느와르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일본 사무라이 극을 보는 것 같기도 한 이 시대를 혼동스럽게 만드는 영화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는 평가를 내리고 싶다.
5) 기타
이외에도 특징으로 킬 빌의 오마주에 대해서 다루어 보고 싶기도 했고, 배우들의 특징에 대해서도 다루고 싶기도 했는데, 그러기에는 점점 분량은 늘어가고, 내 시간은 줄어들고, 나는 피곤하고 그런 이유들로 인해서 또다시 과감하게 생략하겠다. 사실 이 영화는 오마쥬 덩어리라서, 오마쥬가 아닌 장면을 찾기가 더 힘든 영화인걸 생각하면, 누가 머리 아프게 '아, 이 장면은 이거 흉내낸거다.' 같은 소리를 듣고 싶을까 싶다.
오마쥬가 아니고 다른 건, 옥의 티 찾기를 하고 싶었는데, 이거 생각보다 너무 많아서 포기하도록 하겠다. 몇가지 예를 들자면, 오렌의 애니메이션 씬에서 리무진에 탄 남자를 죽이려고 할 때, 오렌의 손톱이 빨간색이다가 깨끗해졌다가 한다던가, 바네사 그린이 자기 딸 사진을 보여줄 때 사진을 잡은 위치가 변한다던가 하는 것 등등.
또 색깔, 원색을 사용해 굉장히 매력적인 (예를 들어 노란 트레이닝복, 흰색-연노란색으로 대조가 되는 바네타 그린의 집, 어둠을 배경으로 흰 눈이 내리는 정원 등등) 장면을 구성한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이건 그야말로 귀찮아서 생략하는 것이다. (나중에 진짜 나중에 어쩌면 의지와 시간이 생겨서 수정할 수도 이뜸)
4. 감상평
'B급 영화' 느낌이 잔뜩 나는 영화이고, '생각할 필요 없이, 예쁜 여주인공이 나와서 이것저것 다 깨부수는 영화'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필자는 킬 빌이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생각할 점들은 많이 던져주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은 과장된 액션신과, 고전적인 느낌을 주는 연출에서 그저 '오마쥬물' 정도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오마쥬를 이렇게 높은 퀄리티로 헐리우드에서 만들 수 있는 감독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그런 오마쥬물 속에서 자기 색깔을 쏙쏙 집어넣는 감독이 또 어디 있겠는가?
예를 들어, 고고 유바리.
고교생인데, 철퇴를 무기로 쓰고, 살인을 즐기는 교복 입은 캐릭터를, 헐리웃에서 누가 만들 수 있을까. (고고 유바리의 등장 장면, 즉 원조 교제를 떠오르게 만드는 그 장면은 우리 나라에서는 아청법에 걸리는 장면일까? 하는 의문이 갑자기 든다.)
말 그대로 쿠엔틴 타란티노가 아니면 하지 못할 기염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유치하고, 촌스러울 수 있는 장면들을 무척이나 감각적으로 구성해내어,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게 만든다. 사실 " 정장을 입고 이상한 가면을 쓴 놈들이 일본도를 들고서 노란 트레이닝복을 입은 여자와 싸운다." 라는 장면은 생각했을 때 무척 우습기만 한 장면인데도, 그 장면을 무척이나 멋있고 박진감 넘치게, 그리고 진지하게 그려내는 것만해도 쿠엔틴 타란티노의 감각이 굉장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대사가 적어, 캐릭터에 몰입하고, 액션에 몰입하기는 편하다. 그러면서도 영화광들이라면 보면서 '아, 이건 무슨 장면 같다'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고, 특히 슬슬 잊혀지고 있는 동양쪽 고전들을 한 번 떠오르게 하여 묘한 웃음을 짓게 하기에 좋은 영화. 아무 생각 없이 감각적인 장면들에 몰입하며, 스트레스가 사라질 때까지 자극적이고 과격한 장면들을 보며 시간을 보내기에도 좋은 영화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복수에 대해서, 그리고 이 묘한 명예에 대해서 생각해보기에도,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융합에 대한 고민을 할 만한 계기를 주기도 하는 영화이다.
그렇지만, 역시 본 씨리즈나 테이큰 같은 헐리웃의 세련된 액션씬을 좋아하는 관객에게는, 그리고 잔인한 장면을 싫어하는 관객에게는 추천하기 쉽지 않은 영화다. 세련되고 깔끔한 액션을 원하신다면, 그리고 엽기적이거나 잔혹한 장면을 싫어하시는 분이시라면, 쿠엔틴 타란티노에 대해서는 조용히 물러나심이 좋을 것 같다.
5. 마무리
글을 쓰고 있으려니, 대체 그냥 때리고 죽이고 싸우는 영화를 무슨 정신으로 이렇게 좋아하느냐, 혹은 이렇게 열심히 보느냐 싶을 수도 있겠다 싶다.
확실히 킬 빌은 그냥 생각 없이 화려한 액션씬과 "우마 써먼 진짜 짱 크다." "우마 써먼 예쁘네." "우마 써먼 되게 잘하네." "우마 써먼 저게 결혼한 아줌마야?" 같은 생각을 하면서 멍하니 보기에도 좋은 영화다. 그리고 영화 자체가 무슨 엄청나게 깊은 내용을 가지고, 철학적으로 심도 있는 포지션을 취해서 다루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쉽게 볼 수 있는 영화이면서도, 생각할거리를 툭툭 던져주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상상과 생각의 여지를 많이 남겨두었기에, 이 영화가 소위 말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또는 '심도 있는' 영화들보다 괜찮다고 생각한다.
매트릭스처럼 철학적인 영화로 소문이 난 영화나, 인셉션처럼 '복잡하면 복잡할 수록 쿨해보이겠지' 같은 생각을 하고서 심도 있어 보이는 척을 한 영화들도 분명히, 생각할 것들도 많고, 좋은 영감들도 많이 주는 영화이다. 그렇지만 그런 고민을 강요하는 느낌이 드는 영화보다는, 이렇게 아예 고민 따위는 전혀 필요 없을 것처럼 접근하면서도, 나중에 생각해보면 은근 고민할 거리가 많은 영화가 더 좋은 영화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확실히 내 그저 개인적인 취향인 것 같다.
Murat Palta의 작품을 보이는 것을 끝으로, 이 두서없고 끝으로 갈 수록 잠에 취해서 뭐라고 썼는지 모를 리뷰를 끝내고자 한다.
Murat Palta는 킬 빌을 마치, 아주 오래된 이야기, 백마를 탄 기사의 무용담을 그린 동화나, 서사시를 그린 것처럼 묘사했다. 그리고 그 묘사는 킬 빌과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느껴진다. 킬 빌이라는 영화 자체, 쿠엔틴 타란티노라는 감독 자체가 그러하다. 그는 언제나 오래된 이야기를 진행하고, 이제는 시시콜콜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들을 사랑한다.
아주 오래된, 그래서 이제는 유치하게 느껴지는 소재와 장면, 그러한 고전적인 장르를 서양적인 관점에서, 특히 동양에 대한 묘한 판타지를 가지고 있는 서양인의 관점에서 해석한 영화, 킬 빌. 특별히 피가 쏟아지고 팔 다리가 무처럼 쑹덩쑹덩 잘리는 장면에 대한 혐오감이 없다면, 한 번쯤은 봐도 좋을 영화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여자친구랑 특별한 날, 이 영화를 보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월 1일을 맞이하며, 실존주의적인 의미에서 킬 빌을 여자친구와 보았다가, 여자친구가 무척 화가나서 고생한 남자 1의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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